낙선재는 창덕궁에 있는 조선 왕실 한옥으로 헌종 13년(1847년)에 사대부 주택 양식을 모방하여 건축하였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면서 당시 최신 기술을 접목하여 세련되고 섬세한 공예미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를 비롯한 구황실 사람들이 최후까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창덕궁 낙선재 기본정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지하철 :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문화재 : 대한민국 보물 제1764호
지정일 : 2012년 3월 2일
입장료 :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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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를 건축한 조선 24대 국왕 헌종
헌종은 1827년 9월 8일, 후에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효명세자가 20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왕세손에 책봉되어 할아버지 순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헌종 13년(1847년) 창덕궁에 낙선재를 건축한다.

23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8살에 왕위에 올라 1834년부터 1849년까지 재위 기간이 15년이나 된다. 즉위 후 6년 동안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이어졌고 이후 친정을 시작하여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 세우며 개혁 의지를 드러내지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다.
낙선재의 마지막 주인 순정효황후
해풍 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1894년 9월 7일 태어났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였던 순명효황후가 사망하자 윤택영과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의 거래로 1907년 황태자비가 된다.

순정효황후에게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엿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겼다는 이야기이다.

감히 황후의 치마 속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었지만, 큰아버지였던 윤덕영이 순정효황후를 밀치고 옥새를 빼앗아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황후에서 이왕비로 격하되고 순종이 사망하자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하였으며 휴전 후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구황실에 비판적인 이승만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아 돌아갈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낙선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고 1966년까지 구황실 사람들과 낙선재에서 기거하다 그곳에서 별세한다.
낙선재
낙선재는 1847년, 사대부 주택 형식으로 지은 왕실 한옥으로 창경궁의 동궁인 낙선당이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헌종이 사랑했던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건축했다고 한다.

헌종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며 비어있던 낙선재를 갑신정변 이후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일제강점기와 일제의 패망으로 인한 광복,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순정효황후와 덕혜옹주를 비롯한 구황실 사람들이 비교적 최근인 1989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창덕궁에 입장하여 낙선재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수평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사괴석 위에 벽돌로 쌓은 담장이다. 곡선이 아름다운 한옥 지붕과 직선으로 뻗은 사고석 담장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첫인상부터 강렬했던 낙선재에 도착해서 솟을대문으로 입장하면 행각이 둘러싸고 있는 건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며 처마 곡선이 아름다운 누마루가 시선을 끈다.
평면 구성
낙선재는 전면 여섯 칸 측면 두 칸의 장방형 평면에 좌측 전면 누마루 한 칸과 우측 배면 온돌방 부분 두 칸이 돌출되어 있다. 전면에 세 칸 규모의 툇마루가 있고 배면에 건물을 따라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두 칸 규모의 누마루와 한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우측에 두 칸 규모의 온돌방 2개소와 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 및 가구 구성
낙선재의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 세벌대 기단으로 바닥은 방전으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사다리형 초석을 사용하였으며 누마루는 외벌대 기단 위 장주초석을 사용하였다. 누마루 하부에는 낙선재의 유명한 빙렬문이 있다. 화재를 예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며 마치 현대 추상미술을 연상시킨다.

대청을 기준으로 일고주오량가의 낙선재는 사각 단면의 사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창방과 직교하여 초익공을 설치하고 주두 위 대들보와 직교한 장혀와 원형 단면의 굴도리가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지지하고 있다.

누마루의 귀익공은 창방과 장혀 뺄목을 각각 초익공과 이익공으로 마감하였고 화려한 궁궐 속 다른 전각과는 달리 민가 형식의 주거 건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차분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창호와 담장 등에 사용된 다양한 장식적인 패턴과 조각, 섬세한 건물의 선, 익공식 공포의 사용으로 왕실 한옥다운 화려함 또한 엿보인다.
낙선재를 바라보며
낙선재는 조선 왕실의 생활상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유효할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조선의 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절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 한옥 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당시 최신 기술을 접목한 독특한 매력을 가진 건축물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전통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낙선재에 산책 삼아 다녀오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