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위치한 서울 5대 궁궐 중 하나로 광해군에 의해 착공되었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동궐과는 대비되는 서궐로 불리며 조선후기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의 이궁으로 오랫동안 기능했지만 지금은 서울의 다섯 궁궐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잊혀진 왕궁이기도 하다.

경희궁 기본정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신문로 2가)
지하철 :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640m
문화재 : 대만민국 사적 제271호
지정일 : 1963년 1월 18일
운영시간 : 09:00 – 1800
정기휴무 : 매주 월요일
경희궁
경희궁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인조의 부친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궁궐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하던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빼앗아 궁궐 공사를 시작했으며 그것이 바로 경희궁이다.

광해군 재위 기간인 1617년 착공하여 1620년 완공되었으며 창건 이래 경덕궁으로 불리다가 영조 재위 기간인 1760년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정궁 역할을 하던 창덕궁의 이궁 역할을 훌륭히 해내며 동궐로 불린 창덕궁과 창경궁에 대비되는 서궐로도 불리게 된다.

이후 19세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숭정전과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당 다섯 전각만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어 경복궁 중건 공사의 목재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경희궁은 대부분 빈터가 되었지만 일제강점기 그나마 남아 있던 다섯 전각마저 훼손되며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80년대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고 숭정문과 숭정전 및 자정문과 자정전, 태령전과 각 전각의 회랑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화문
정동길을 따라 경희궁 방향으로 향하면 도로 건너편으로 흥화문이 보인다. 경희궁엔 총 5개의 문이 있었으며 흥화문을 비롯하여 흥원문, 숭의문, 개양문, 무덕문으로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동쪽에 있었다.

흥화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오량가 건물로 화강석을 가공한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 단면의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어 건축된 삼문이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이 결구되어 그 위에 다포식으로 배치된 내7포, 외5포의 공포가 굴도리와 처마를 지지하고 있으며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 우진각 지붕 건물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이전을 겪게 된다.

1915년 도로 확장에 따라 원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기게 되었고 이후 남산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사찰인 박문사의 정문이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해방 이후 박문사 터에 들어선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 공사를 계기로 현재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흥화문은 원래 위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경희궁의 원형과 건물 배치의 의미를 상당히 해치고 있다. 경희궁과 서대문 복원 계획을 계기로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길 바란다.
금천교
경희궁의 원형을 상상하며 원래 동선으로 걷기 위해 흥화문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금천교쪽으로 향했다. 금천이란 조선의 궁궐 내부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하천으로 왕의 공간과 민간의 공간을 경계 짓는 하천이다.

금천교는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경희궁은 흥화문이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해 그 의미를 느끼기 어렵게 되었다.

두 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홍예교로 하부는 석조의 특성상 재해에도 살아남아 원형을 유지한 채 제 위치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상부 난간은 복원 시 새 돌을 사용해 돌의 색으로 원형과 복원 부분을 구분할 수 있다.
숭정문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희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과는 달리 계속 오르막길을 걸어야 하며 주요 전각으로 갈수록 높은 곳에 건축되어 있다.

멀리서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인왕산을 배경 삼은 숭정문을 보고 소름 돋을 정로도 엄청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적인 궁궐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는 풍경이었다.
우리나라 전통 궁궐은 예부터 중국과는 달리 자연 지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구려 장안성이 그랬고 신라 월성, 고려 만월대가 그렇다. 경희궁의 전각들은 다른 궁궐의 전각에 비해 규모 자체는 작지만 인왕산 자락의 자연 지세를 이용했기 때문에 그 위엄은 어느 궁궐에 밀리지 않는다.

숭정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오량가 건물로 장대석으로 축조한 높은 월대 위에 건축되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원형 단면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이 사용되어 창방과 평방이 결구되었으며 내7포, 외5포의 공포가 다포식으로 배치되어 굴도리와 처마를 지지하고 있다.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 팔작지붕 삼문으로 높은 월대 위에 건축되어 있어 흡사 고려 만월대를 연상시키며 인왕산을 병풍 삼아 자연지세를 이용한 한국적인 궁궐에 크게 감동하였다.
숭정전
숭정문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숭정전 현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에도 살아남아 원위치에서 보존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본격적으로 훼손되며 수모를 겪게 된다.

2단으로 구성된 넓은 월대 위에 건축된 이고주칠량가의 숭정전은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된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주두가 결구되어 있으며 외5포의 주심포 구조로서 기둥 사이에는 화반이 설치되어 있다.

원형은 일제강점기 조계사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변형이 심해 제자리에 옮기지 못했다고 하는데 목조건축의 특성상 핑계에 불과하다.
현재 복원된 숭정전은 장식 등 디테일에서 원형과는 차이가 있으며 경희궁의 역사성을 복원하기 위해 원형의 이전이 매우 중요하다. 사라진 전각은 어쩔 수 없으나 원형이 있는 전각은 제자리를 찾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정문
원형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숭정전 뒤편에 위치한 자정문으로 향했다. 자정문은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의 정문으로 지형의 특성상 숭정전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은 화강석 장대석 기단 위에 건축되어 편전의 위엄을 보다 높이고 있다.

원형 단면의 초석과 기둥이 사용된 자정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오량가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머리에 창방과 물익공이 직교하여 결구되어 있으며 그 위에 주두가 설치되어 있다.
주심포 구조로서 기둥 사이에는 화반이 설치된 삼문으로 원형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경복궁 중건 공사의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철거되었고 경희궁 복원 공사를 계기로 복원되었다.
자정전
자정문을 지나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으로 향했다. 편전은 왕이 평상시 정사를 보던 집무실로 숭정전 뒤편의 자정문을 지나면 자정전으로 갈 수 있다.

네벌대와 두벌대로 구성된 2단 기단 위에 건축된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 오량가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주두가 결구되어 있으며 외5포의 주심포 구조로서 기둥 사이에는 화반이 설치되었고 굴도리가 사용되었다.
자정전의 정문인 자정문도 높은 기단 위에 건축되었는데 자정전은 거기에 더해 또 다시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건축되어 서울 5대 궁궐 중 가장 작은 규모의 편전임에도 그 위엄은 절대 작지 않다.
자정문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경복궁 중건 공사에 사용하기 위해 해체되었으며 경희궁 복원 공사를 계기로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다.
서암
자정전에서 태령전쪽으로 향하면 기이한 형상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바위가 나온다. 왕기가 서려 있다고 하여 광해군이 경희궁을 건축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바위이다.

서암은 원래 왕암으로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궁궐 공사를 진행하던 광해군이 이 왕암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곳의 주인인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이곳에 경희궁을 짓기 시작했다.
경희궁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찾아간다면 정말 놀랄만한 풍경인 것 같다. 누가 보더라도 오묘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바위이다. 이 또한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우리나라 궁궐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학이다.
태령전
서암의 묘한 기운을 느끼고 현재 복원된 경희궁의 마지막 종착점인 태령전으로 향했다. 태령전은 경희궁을 사랑한 임금인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세벌대와 두벌대로 구성된 넓은 화강석 월대 위에 건축된 태령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오량가 건물로 원형 단면의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다. 창방과 직교하여 초익공이 결구되었고 그 위에 이익공이 대들보와 굴도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주심포 구조로서 기둥 사이에는 화반이 설치되어 있다.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의 팔작지붕 건물로 재위 기간 중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던 영조의 어진 13점 중 7점을 봉인한 장소였다. 경희궁의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경복궁 중건 공사를 계기로 철거되었으며 경희궁 복원 공사를 계기로 다시 복원되었다.
잊혀진 왕궁 경희궁 답사를 마치며
경희궁은 서울 5대 궁궐 중 원형이 가장 많이 훼손된 탓에 존재감이 적어 잊혀진 왕궁인 듯 느껴진다.
일부러 원래 흥화문이 있던 금천교 쪽으로 시작하여 원형의 동선을 상상하며 답사했다. 조금씩 높아지는 자연 지형을 따라 멀리서 보이던 숭정문과 인왕산의 풍경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한국의 미학을 알려주는 듯했다.

서대문과 경희궁 일대의 복원 계획에 따라 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전체 복원은 힘들겠지만 흥화문이 제자리를 잡고 숭정문을 향하는 길만이라도 복원된다면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