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은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조선 26대 국왕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거주하던 잠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함께 구한말 안타까운 역사를 생생하게 품고 있는 운현궁에 다녀왔다.

운현궁 기본정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지하철 :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
문화재 : 대한민국 사적 제257호
지정일 : 1977년 11월 22일
입장료 : 무료
운영시간 : 09:00 – 18:00
정기휴무 : 매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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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주인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손자로 1821년 1월 24일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하응이다. 1830년 여흥 부대부인 민씨와 혼인하여 고종을 비롯한 2남 2녀를 두었고 철종이 사망한 후 1863년 고종을 대왕대비 조씨와 익종의 양자로 들여 왕위에 올렸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10년 동안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이루어졌으며 집권 중 누구도 하지 못했던 안동 김씨 세도정치 척결과 비변사 폐지, 서원 철폐, 국방력 증강, 경복궁 중건, 삼정의 개혁 등의 업적을 이루었으나 동시에 천주교 탄압과 쇄국 정치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인물이기도 하다.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며 10년간의 섭정이 끝나고 실각한다. 이후 죽는 순간까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재집권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한다.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의 추진력과 개혁적인 성향으로 봤을 때 시대를 잘못 만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현궁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집권하던 때에는 담장의 길이만 수백 미터에 이르고 사대문을 설치할 정도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며 운현궁의 영역이 계속 줄어 현재는 사랑채인 노안당과 명성황후의 왕비 수업이 이루어졌던 노락당 그리고 안채인 이로당을 중심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운현궁 정문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운현궁의 정문이 나온다. 원래 운현궁에는 정문과 후문, 경근문과 공근문이라는 사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정문은 1998년 운현궁 복원 공사 때 건축된 것으로 대문과 그것을 기준으로 좌측으로 길게 배치된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랑채에는 화장실과 기획전시실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때에는 이 경계를 이룬 담장이 수백 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위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문의 초석은 한옥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다리형 초석이며 가구 구성으로는 사모기둥에 납도리와 대들보가 결구된 민도리식 가구로 홑처마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솟을대문이다.
화장실과 기획전시실이 있는 행랑채는 삼량가 맞배지붕 건물로서 사다리형 초석 위의 사모기둥에 납도리와 대들보가 결구된 민도리식 가구로 도로 측 하부는 장대석 위에 사괴석을 쌓은 화방벽으로 마감되어 있다.
노안당
운현궁의 정문을 지나 곧장 노안당으로 향했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공간이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평면구성으로는 대청과 방을 중심으로 전면과 후면, 측면에 퇴가 배치된 정면 여섯 칸에 측면 세 칸의 공간 한쪽에 노안당의 누마루인 영화루가 배치되어 있으며 방과 대청을 따라 감싸고 있는 툇마루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노안당의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 세벌대 기단으로 그 위에 사다리형 초석이 사용되었으며 영화루에는 두벌대 기단 위 장주초석이 사용되었다. 가구 구성으로는 대청을 기준으로 이고주오량가로서 사모기둥에 굴도리와 대들보가 결구된 민도리식 가구로 홑처마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시절 이곳에서 주요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집권하는 동안 안동 김씨 세도정치 척결과 서원 철폐와 같은 굵직한 개혁 정책을 펼친 역사적인 장소이다.
노락당
노안당을 둘러보고 옆에 있는 노락당으로 향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서 처음 안채로 건축되었으나 명성황후가 삼간택 이후 이곳에서 왕비 수업을 받게 되어 안채에서 별궁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평면 구성으로는 전면 열 칸에 측면 세 칸으로 건물 중심부에 넓은 대청이 있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주거 공간인 방이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있고 전면과 후면에 퇴가 배치되어 있다.
부속건물로 인해 “ㅁ”자 배치가 되어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으며 안마당과 툇마루, 대청 그리고 다시 툇마루와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노락당의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 두벌대 기단으로 그 위에 사다리형 초석이 사용되었다. 가구 구성으로는 대청 부분을 기준으로 사모기둥의 머리에 창방과 초익공이 결구되어 굴도리와 대들보를 지지하는 이고주칠량가 초익공식 가구로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특징으로는 유일하게 운현궁에서 공포가 장식되어 이곳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안마당에서 건물 너머로 일제가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위해 지어준 양관이 보인다. 양관도 운현궁의 일부였으나 현재는 덕성여대 소유로 운현궁과 분리되어 있다. 근대 건축과 전통 건축의 조화가 이색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 안타까운 역사 또한 숨겨져 있다.
이로당
노락당을 지나 운현궁의 마지막 종착지인 이로당으로 갔다. 이로당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 부대부인 민씨의 거처로 명성황후의 왕비 수업 이후 노락당이 별궁이 되자 이로당이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의 노인을 뜻하는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여흥 부대부인 민씨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로당은 전면 일곱 칸에 측면 일곱 칸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을 보이며 건물 가운데에 중정이 있어 “ㅁ”자 배치를 형성하여 중정을 중심으로 대청과 방이 둘러싸고 있는 공간구성을 띠고 있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중정이 매력적으로 보였으나 내부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아쉽게 느껴졌다.

이로당의 기단은 화강석 세벌대 기단으로 사다리형 초석이 사용되었다. 가구 구성으로는 대청을 기준으로 일고주오량가 건물로 팔작지붕과 우진각지붕이 혼합되어 있다. 사모기둥에 굴도리와 대들보가 결구된 민도리식 가구로 연목만 사용된 홑처마이다.
운현궁을 다녀와서
운현궁은 단순히 옛 건물이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와 역사가 현재도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운현궁에 방문하여 노안당과 노락당, 이로당 등 각각의 건물을 살펴봄으로써 전통 건축의 구성을 파악하고 이 건축물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겪은 역사 또한 알 수 있었다.

역사적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체험하는 것은 책이나 인터넷에서 얻는 정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서울 도심 속에서 시대의 큰 흐름을 함께한 운현궁에 방문하여 전통 전축의 미와 함께 구한말 안타까운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