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격동의 시대를 품은 대한제국 황궁 서울 5대 궁궐

덕수궁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서울 5대 궁궐 중 하나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의 임시 궁궐인 시어소로 사용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궁이 되어 시대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덕수궁 전경
서울시청 서소문 청사 13층에 위치한 정동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수궁 전경.

단풍이 저물어 가는 가을의 끝자락, 전통 건축과 근대 건축이 혼재되어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덕수궁에 다녀왔다.

덕수궁 기본정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5-1)
지하철 : 2호선 시청역 1번 출구에서 71m
문화재 :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지정일 : 1963년 1월 18일
운영시간 : 09:00 – 21:00
정기휴무 : 매주 월요일

덕수궁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으로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이 소실되자 선조의 시어소로 사용된 것을 계기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덕수궁 원형 모형
서울역사박물관에 상설 전시 중인 덕수궁의 원형을 표현한 모형. 현재 남아있는 규모는 이것의 1/3 수준이다.

인조가 즉위하고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조선 후기 역사에서 사라진 존재감 없는 궁궐이었다.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과 화재 사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인 아관파천 이후 외국 공사관이 밀집해 있는 정동에 비어 있던 경운궁을 황궁으로 삼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다시 한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덕수궁 석어당
경운궁 전체 역사와 함께한 석어당.

당시까지도 경운궁은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아있었고 황궁에 걸맞은 위상을 세우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하여 1902년에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어 현재보다 3배나 큰 규모의 궁궐이 되었다.

덕수궁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그러나 2년 후인 1904년, 함녕전 온돌에서 시작된 화재가 덕수궁 전역을 전소시키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경운궁에서 덕수궁 그리고 훼손

화재 사건 이후 고종의 강력한 의지로 재건되지만 중층이었던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되는 등 이전보다 작아진 규모로 중건된다.

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이 황궁이 되자 태황제가 된 고종은 경운궁에 계속 머물며 이때 명칭이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의 덕수궁으로 바뀌게 된다.

중화문 측면
덕수궁 중화문 측면.

일제강점기인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덕수궁 공원화 정책에 따라 많은 전각들이 철거되며 상당한 훼손을 겪는다.

해방 후에 태평로 확장 공사로 원수부를 비롯한 궐내각사 영역이 도로로 편입되고 정문인 대한문 또한 30미터 정도 뒤로 후퇴하여 현재 우리가 아는 덕수궁이 되었다.

덕수궁의 건축물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그대로 관통한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을 비롯하여 중화전과 즉조당 등 전통 건축과 석조전 및 돈덕전 등 근대 건축이 혼재되어 있다.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의 근대 건축물인 중명전.

전통 건축과 근대 건축의 자연스러운 조화가 눈에 띄는 덕수궁은 가을의 끝자락 단풍과 함께하여 더욱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서울 5대 궁궐 중 가장 가을과 어울리는 궁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문

덕수궁에 가기 위해 시청역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대한문이다. 본래 명칭은 대안문으로 덕수궁의 동쪽 편문이었으나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 정문이던 인화문이 사라지며 정문이 되었고 명칭 또한 대한문으로 변경된다.

덕수궁 대한문
태평로 너머로 보이는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 있다.

대한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삼문 형식이다.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으며 전면에 최근 복원된 월대가 있다. 오량가 가구로 기둥 머리에서 창방이 결구되어 있고 그위에 평방과 내7포 외5포의 공포가 다포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의 우진각 지붕의 건물로 원래 지금보다 30미터쯤 앞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태평로 확장 공사의 영향으로 뒤로 후퇴하여 현재 위치로 이동하게 되었다.

금천교

대한문을 지나면 금천교가 나온다. 금천은 왕의 공간과 민간의 공간을 경계 짓는 인공 하천으로 금천교는 보통 궁궐 정문과 중문 사이 중간쯤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덕수궁은 대한문이 원위치에서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에 정문에 입장하자마자 곧바로 금천교가 등장한다.

대한문과 금천교
대한문과 가깝게 붙어 있는 금천교.

덕수궁의 중문인 조원문마저 사라졌기 때문에 금천교의 위치가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조원문의 복원과 대한문이 제 위치를 찾게 되면 좋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어려울 듯하다.

덕수궁 금천교
왕과 민간의 공간을 경계 짓는 금천의 금천교.

덕수궁 금천교는 2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홍예교로 급변하는 시대 속 여유가 없었던 탓인지 다른 궁궐의 금천교와는 달리 석물이나 장식이 없다. 그러나 장식이 없어 오히려 간결해 보인다.

조원문

금천교를 지나면 조원문이 보여야 한다. 조원문은 조선시대 궁궐의 특징인 삼문삼조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덕수궁의 두 번째 문으로 경운궁 화재 사건에도 살아남았지만 일제강점기 훼손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화문으로 향하는 길
조원문이 있어야 하는 자리.

궁궐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삼문삼조의 복원이 필요하며 덕수궁에서 가장 시급하게 재건해야 하는 건물이 아닐까 한다.

덕수궁 행각

대한문에서 중화문으로 향하는 길을 걷다 보면 빈터에 문만 덩그러니 있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는 전각들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이 사라지고 문만 남았기 때문이다.

덕수궁의 아쉬운 점 중 하나가 행각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중화문 옆에 일부가 남아 있어 원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덕수궁 행각
일부 남아있는 덕수궁 중화전 행각.

남아 있는 덕수궁 행각은 오량가 가구로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으며 기둥 머리에 창방과 초익공이 결구되어 있고 그 위에 소로와 장혀, 굴도리로 구성된 홑처마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삼문삼조의 복원과 함께 행각의 복원도 함께 이루어진다면 궁궐로서 어색한 부분이 많이 희석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화문

궁궐보다는 공원처럼 느껴지는 정전으로 가는 길을 걸을 뒤 중화문 앞에 도착했다.

덕수궁 중화문
중화문의 정면.

중화문은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으로 삼문삼조에 따라 정전으로 향하는 덕수궁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문이다. 좌우로 행각이 철거되어 문과 행각 일부만 남아있다.

덕수궁 중화문
중화문의 정면과 측면.

오량가 가구의 중화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삼문 형식으로 세벌대 화강석 기단 위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으며 기둥 머리에 창방과 평방이 결구되어 내7포 외5포의 공포가 다포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덕수궁 중화문
중화문의 배면과 측면.

연목과 부연이 사용된 겹처마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전을 둘러싸고 있던 행각이 사라져 문만 외롭게 남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행각 복원의 필요성이 절실히 다가왔다.

중화전

중화문을 지나면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나온다. 두 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 단층 정전으로 월대 답도에는 황궁답게 용이 조각되어 있다.

덕수궁 중화전
중화전 정면.

중화문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 규모로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으며 기둥 머리에 창방과 평방이 결구되어 내9포 외7포의 공포가 다포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연목과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단층이지만 정전답게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덕수궁 중화전
중화전 정면과 측면.

1902년 덕수궁 완공 당시와 현재 모습이 다르다. 처음 중화전이 준공되었을 때는 중층 건물이었으나 경운궁 화재 사건으로 중화전 역시 소실되고 말았다.

경운궁 화재 사건 당시 창덕궁으로 이어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고종의 강력한 의지로 덕수궁이 재건되며 중화전 역시 다시 건축되지만 이전보다 축소된 규모로 중건되어 그것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현재의 중화전도 좋지만 중층 중화전은 또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하게 한다.

준명당

중화전을 둘러보고 뒤편에 있는 준명당으로 향했다. 준명당은 경운궁 화재 사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는 관명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관명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축소된 규모로 준명당을 지었다.

덕수궁 준명당과 즉조당
복도로 연결된 준명당과 즉조당.

“ㄴ”자 배치의 준명당은 전면 여섯 칸, 측면 세 칸에 북측으로 네 칸 규모의 온돌방이 돌출되어 있으며 이고주오량가 가구로 대청을 중심으로 전후에 퇴가 있는 전후퇴집 평면 형태로 화강석 기단 위에 사다리형 초석과 사모기둥이 사용되었다.

덕수궁 준명당
측면에서 촬영한 준명당.

기둥머리에 창방과 초익공이 결구되어 있으며 장혀과 굴도리가 연목을 지지하며 부연을 덧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바로 옆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하였다.

일제강점기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즉조당

준명당과 복도로 이어져 있는 즉조당은 임진왜란 이후 정릉동 행궁 시절부터 있던 건물이다.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여 즉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덕수궁 즉조당
즉조당 정면.

이고주오량가 가구의 즉조당은 전면 일곱 칸, 측면 세 칸 규모로 “ㅡ”자형 배치를 하고 있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전후에 퇴가 있는 전후퇴집 평면 형태이다.

화강석 기단 위에 사다리형 초석과 사모기둥이 사용되었으며 창방과 이것과 직교하여 초익공이 결구되어 있고 그 위로 장혀와 굴도리가 연목과 부연을 지지하고 있는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화전 창건 전까지 덕수궁의 정전으로 삼았던 곳이며 경운궁 화재 사건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석어당

준명당과 즉조당 바로 옆, 덕수궁에 있는 전통 건축물 중 가장 특이한 모습을 한 석어당이 있다. 한옥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2층 전각으로 단청조차 칠하지 않았다.

덕수궁 석어당
석어당 정면.

“ㅡ”자 형 배치의 석어당은 화강석 기단위 사다리형 초석과 사모기둥이 사용되었으며 정면 여덟 칸, 측면 세 칸의 1층과 정면 여섯 칸, 측면 한 칸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덕수궁 석어당
석어당 정면과 측면.

1층은 창방과 초익공이 기둥에 결구되어 장혀 및 굴도리와 대들보를 지지하는 익공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2층은 기둥 머리에 장혀와 굴도리, 대들보가 결구된 민도리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석어당 또한 화재 사건 이후 중건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광명문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돌아 나와 함녕전의 정문인 광명문으로 향했다. 대한문에서 중화문으로 가는 길에서 본 빈터에 홀로 서 있던 그 문이다.

덕수궁 광명문
광명문 정면.

광명문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삼문 형식이며 외벌대 기단 위 원형 초석과 기둥이 사용되었다.

오량가 가구의 광명문은 기둥 머리에 창방과 초익공이 결구되어 있고 그 위로 주두와 이익공이 대들보와 굴도리를 지지하는 익공식 구조로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설치하여 구조의 보강과 장식의 효과를 주었다.

겹처마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 중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덕수궁 공원화 정책으로 주변 행각이 철거되고 위치가 변경되어 자격루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다 2018년 제자리로 이동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함녕전

광명문을 지나 함녕전으로 향했다. 함녕전은 덕수궁의 침전으로 고종의 개인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계속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1919년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한다.

덕수궁 함전
함녕전 정면.

함녕전은 “ㄴ”자 형 평면 형태로 정면 아홉 칸, 측면 네 칸 “ㅡ”자 형 평면에 북측으로 네 칸 규모의 온돌방이 돌출되어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으며 전후에 퇴가 있는 전후퇴집 평면 구성을 띠고 있다.

덕수궁 함녕전
함녕전 정면과 측면.

네벌대 화강석 기단 위 사다리형 초석과 사모기둥이 사용되었으며 이고주칠량가 가구로 기둥머리에서 창방과 초익공이 결구되어 대들보와 굴도리를 지지하는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경복궁의 전각이었던 만화당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이곳 온돌 수리 공사 중 발생한 화재로 덕수궁 전역이 소실되는 안타까운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중건되어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 개인공간으로 사용된다.

덕홍전

함녕전 바로 옆에 정면 세 칸에 측면 네 칸 규모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의 팔작지붕 건물이 있다. 바로 명성황후의 혼전이었던 경효전 자리에 세운 덕홍전이다.

덕수궁 덕홍전
덕홍전 정면.

덕홍전은 세벌대 화강석 기단에 사다리형 초석과 사모기둥이 사용되었으며 이고주칠량가 가구로 기둥 머리에 창방과 초익공이 결구되어 있고 그 위에 이익공이 대들보와 굴도리를 지지하는 이익공식 구조이다.

덕수궁 덕전
덕홍전 정면과 측면.

경운궁 화재 사건으로 경효전이 소실되었고 1912년에 덕수궁에서 가장 늦게 중건되어 덕홍전으로 명칭을 바꾼 후 고종이 빈객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정책으로 주변 행각 및 전각들이 철거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관헌

덕홍전에서 나와 북쪽에 있는 정관헌으로 향했다. 정관헌은 덕수궁에서 가장 먼저 건축된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여부 및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덕수궁 정헌
서양식 건축에 우리 전통 양식이 혼합된 정관헌.

콜로니얼 양식의 베란다와 주두에 사용된 콤퍼지트 양식 그리고 기단과 천장, 지붕 형태 등 우리 전통 건축 양식이 조합된 절충주의 양식으로 볼 수 있으며 전통과 근대가 조화로운 덕수궁을 단일 건물로 표현한 듯 느껴졌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 규모의 건축물로 기둥식과 벽식 구조가 혼합되어 있으며 목재 트러스로 팔작지붕을 구현한 점과 낙양과 난간의 다양한 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석조전

정관헌에서 발길을 돌려 석어당과 중화전 사이의 길을 지나면 석조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석조전은 덕수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양식 건물로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덕수궁 석조전
중화전과 석어당 사이 길에서 보이는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와 함께한 석조전의 건축은 고종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벽돌을 사용한 조적식 벽체 위에 철골과 데크플레이트에 콘크리트를 타설한 슬래브로 구성된 구조이며 마감재로 석재가 사용되었다.

덕수궁 석조전
석조전 정면.

그리스와 로마 건축의 부활을 의미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이오니아식 열주와 페디먼트에 새겨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석조전의 완공과 함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이후 고종이 귀빈 접대를 위해 사용했으며 고종이 승하한 뒤에는 미술관 및 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를 거쳐 현재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석조전 바로 옆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제에 의해 일본인들의 작품을 따로 전시하기 위한 미술관 용도로 건축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정면.

석조전과 동일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일제의 필요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덕수궁의 역사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건축물이다.

돈덕전

석조전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덕수궁의 다른 양관인 돈덕전이 나온다.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열 계획으로 1902~1903년 사이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며 연회장 및 영빈관과 순종의 즉위식 용도로 사용되었다.

덕수궁 돈덕전
돈덕전 정면.

고종이 승하하고 방치되던 돈덕전은 사라지게 되었으나 발굴 조사 및 약식 평면도와 사진 자료를 기반으로 2023년에 복원 공사를 완료하여 일반에 개방하였다.

현재 돈덕전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골조 건물로 벽돌과 동판으로 외부 및 지붕을 마감하였으며 대한제국 관련 전시실과 자료관으로 쓰이고 있다.

고종의 길 : 아관파천과 러시아 공사관

돈덕전에서 덕수궁 서문을 지나 고종의 길로 향했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진 120m의 길이다.

고종의 길
러시아 공사관이 보이는 고종의 길.

이곳에는 우리 역사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아관파천으로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경복궁에서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어가를 옮긴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 전망탑
언덕 위의 러시아 공사관.

고종의 길은 아관파천을 끝낸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외국 공사관이 밀집해 있던 정동에 황궁을 건설하며 러시아 공사관에 오가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공사관 전망탑
전망탑만 남은 러시아 공사관.

고종의 길의 끝엔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쓸쓸히 전망탑만 남은 러시아 공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중명전

덕수궁의 마지막 답사 건물인 중명전을 보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에서 정동을 향해 걸었다. 중명전은 현재 덕수궁 권역과는 따로 떨어져 있어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 정면.

지하 1층, 지상 2층의 중명전은 벽돌로 쌓은 조적식 구조로 바닥은 목재로 장선을 건 뒤 마루판을 깔았으며 경사 지붕은 목재 트러스를 사용하여 동판으로 마감하였다.

중명전은 황실도서관이었던 수옥헌의 정전이며 1904년, 덕수궁에 일어난 화재로 궁궐 전역이 소실되자 고종이 편전 및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로 해방 후 방치되어 많은 변형을 겪었다.

2009년, 복원 및 보수 공사를 통해 원형을 되찾았으며 지금은 을사늑약을 비롯한 대한제국 관련 전시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 답사를 마치며

정동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덕수궁의 전경을 볼 수 있으며 이곳에 각각 다른 시대가 공존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외세의 침략으로 우리 소중한 문화재가 훼손되어 궁궐에서 공원으로 변해버린 덕수궁의 복원과 보존의 필요성 역시 절실하게 다가온다.

덕수궁 경
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가 공존하는 덕수궁.

조원문의 재건을 통한 삼문삼조의 복원과 전각 주변 행각의 재건을 통해 궁궐로서 형식을 갖춘다면 우리 전통건축과 서양에서 유래한 근대건축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건축과의 조화라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궁궐로 세계에 통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