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유독 반민족행위자의 가옥이 많다. 민영휘의 집이었던 관훈동 민씨 가옥 또한 그중 하나이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으로도 불렸던 이 집과 관련 인물의 삶을 통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어두웠던 역사와 건축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관훈동 민씨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4길 28
원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30-1
문화재 :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지정일 : 1977년 3월 17일
연면적 : 323.96㎡
건축연도 : 1870년대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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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
민영휘(1852년 5월 15일 ~ 1935년 12월 30일)는 명성황후의 15촌 조카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이어진 민씨세도기 가문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관훈동 민씨 가옥은 민영휘가 자신의 일가를 거주하게 할 목적으로 건축되었다.
조선이 외세에 의해 잠식당하는 계기가 된 임오군란의 청나라군 개입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로 상황에 따라 청나라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으며 그 대가로 자신의 부와 기득권을 확보해 나갔다.
사후 역사의 평가가 두려웠던 것인지 후에 휘문의숙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하기도 하며 조선 최고의 갑부로 부귀영화를 누리다 향년 83세에 사망하였다.
스스로는 영원히 잊혀지고 싶겠지만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이기에 그의 집을 보존하여 민영휘라는 인물을 영원히 기억하며 많은 사람의 평가가 이어졌으면 한다.
태극기를 처음 사용한 부마도위 박영효
박영효(1861년 6월 12일 ~ 1939년 9월 21일)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1872년 12세의 나이에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조선 마지막 부마가 되지만 3개월 만에 사별하게 된다.
오위도총부도총관, 혜민서 제조, 판의금부사 등의 여러 관직을 거치며 임오군란에 의한 일본에 대한 피해 보상을 골자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계기로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선발되어 사절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이응준이 만든 태극기를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친일 급진개화파가 되어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씨 세도 정권을 타도하고 대권을 잡기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하여 주동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긴 망명 생활을 이어간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귀국할 수 있었지만, 급진개화파를 사살할 계획을 세운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일에 연루되어 1895년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여 1907년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식산은행 이사 및 동아일보 창간 등의 활동을 했다.
관훈동 민씨 가옥은 처음엔 박영효의 집이라고 알려져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조사를 통해 민영휘의 집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박영효의 집은 관훈동 민씨 가옥 바로 옆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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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동 민씨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옥으로 187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팔대가 중 하나이다. 원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이다.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건물이었으나,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로 이전하면서 사랑채와 별당채를 복원하여 현재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외벌대 반 기단 위에 무려 이고주칠량가 굴도리식 가구로 겹처마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 팔대가답게 시원시원한 면적과 건물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툇마루가 인상적이다.
예산과 면적의 제한 없이 계획되었을 집으로 일부 계층을 위한 고급 주택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왕실 한옥도 아닌 민간 한옥으로 당시 민씨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품위나 감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물이다.
사랑채
잘 다듬어진 세벌대 장대석 기단 위 일고주오량가 납도리식 가구로 홑처마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건물 한편에 누마루가 있다.
관훈동 민씨 가옥은 인간적인 공간을 지향하는 한옥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웅장한 규모의 잘지어진 집이지만 그만큼 한옥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감동은 덜할 수 밖에 없다.
크기만 한 집 관훈동 민씨 가옥을 바라보고
흔히 주택을 두고 설계비나 시공비가 얼마라든지 마감재는 얼마나 고급을 사용했으며 면적은 얼마인지 등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로는 비싼 집은 될지언정 결코 좋은 집은 될 수 없다.
관훈동 민씨 가옥은 우리의 정서에도 한옥의 본질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기만 한 집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남아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집을 둘러 보고 나라를 팔 정도로 각각 자신들의 욕망을 표현한 듯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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